미술사/서양미술사

[서양미술사] 중세 미술 : 로마네스크 미술의 건축과 조각 특징(교차궁륭, 원통형궁륭, 팀파눔조각, 최후의 심판)

pupu91 2020. 11. 1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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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네스크

'로마와 같은', '로마식' 이라는 뜻으로 고딕 양식과 구분하기 위해 19세기에 고안된 건축 용어. 로마네스크라는 용어는 건축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11세기 후반과 12세기 유럽의 건물들이 두꺼운 벽과 아치가 있는 고대 로마의 석조 건축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 로마네스크 미술 

10세기-12세기에 걸쳐 서양 각지에서 발전한 미술.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징

 

석고로 된 둥근 비중으로 덮인 공간인 '궁륭'

 

 

 

 

1. 구조적 특징 : 아치와 버팀기둥 체계

 

  • 버팀기둥

자유롭게 서있는 단단한 석조 지탱물로 작은 창문들이 달린 두껍고 매끈한 석조벽 등을 받피는 기둥.

 

  • 아치 

궁륭을 이루게 되는 아치는 일련의 쐐기 모양 벽돌로 이루어진 구조 전체다.  부스와르라고 하는 이 벽돌들은 입구 위에 걸치는 데 사용된다. 아치는 단순한 상인방보다 더 넓은 입구에 걸칠 수 있기 때문에  궁륭 구조 안에서 지탱물들을 더욱 적게 쓸 수가 있다.  기독교 건축가들은 교회 내부에 가능한 한 장애물을 적게 지어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커다란 이점이었다. 

 

  • 석조 궁륭 구조의 내화성

 

 로마네스크 이전의 초기 기독교 시대의 교회 건축은 대부분 목조 지붕이었다. 이는 유럽에 목재가 풍부했고 또 이것이 건물을 세우는데 비교적 수월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중세 연대기를 보면 그런 목조 지붕 교회를 무너뜨린 수 많은 비극적인 화재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 

 

 

 

 

2. 궁륭의 형태

 

 

 

 

 

 

 

가장 간단한 궁륭으로 옆으로 화장된 아치형으로 '원통형' 또는 ;터널형 궁륭'은 아주 무겁고 건물 내부에 빛이 들어가기 힘들기 때문에 고대 로마의 건축가들은 '교차 궁륭'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두 개의 원통형 궁륭이 직각으로 교차해 네개의 버팀기둥 위에 닫집 모양을 만든다. 평면에다 교차 궁륭을 짓는 것은 힘들었지만 더욱 개방된 이 형태는 건물 안으로 더 많은 빛이 들어오게 해주어 호평을 받았다. 원통형과 교차형의 두 가진 궁륭은 거의 모든 로마네스크 교회에 쓰였으며, 이 궁륭들은 시각적으로 안정적이고 견고하며 편안한 느낌을 주어 형태적으로 유연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로마네스크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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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세르냉 대성당>단면도

교회는 십자가형으로 설계되었는데, 교회 회중들이 일어났다 무릎을 꿇었다 하는 긴 신랑의 중간을 지나 짧은 익랑이 가로지르고 있다. 아케이드는 순례자들이 본당에 예배 중인 신자들을 방해하지 않고 옆에 있는 측랑 복도를 통해 걸어갈 수 있다록 설계되었다. 재단 뒷부분은 십자가에서 예수의 머리가 놓이는 부분으로 베개라는 뜻의 슈베라고 불리는 반원형 예배실이 있어 성인들의 유물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로마네스크 성당 조각 - 팀파눔

 

로마네스크 성당 외부에는 정문 주위의 부조조각을 뺴고는 소박한 느낌을 준다. 당시 신자들은 대부분이 문맹이었기 이들에게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석조판에 교리를 의미하는 조각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조각들은 버팀기둥의 맨 위부분인 주두나 원주에 자리했다. 

 

<최후의 심판> 정면 입구 팀파눔, 생 라자르 성당, 프랑스 오툉

 

 

 

 

 

 

 

 

<최후의 심판> 서쪽 파사드 팀파눔, 생 프와 성당 프랑스 콩크

 

 

조각들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정물의 상인방 위, 아치 아래의 반원형 공간인 티파눔에 집중된 조각들이다. 여기에는 천국의 왕관을 쓰고 승천하는 그리스도와 죄인의 영혼을 먹고 있는 요괴들, 죄인의 유식을 꼬챙이로 꿰고있는 악마의 모습등과 같이 신,구약의 교훈적인 장면이 새겨져있다.

 

수사본

 

 

매스터 휴고 <모세의 설법> 12세기 초, 영국 케임브리지

 

야만족들이 로마 제국의 도시들을 약탈하고 지난간 혼란 속에  수도원만이 유일하게 유럽의 문명을 지키는 장소가 되었다. 수도원에서는 수도사와 수녀들은 수사본을 만들었는데, 좁은 의미로는 삽화 예술을. 넓은 의미에서는 서구 문명 전체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파피루스 두루마리 대신 여러 장의 우피지와 양피지 한쪽을 묶은 책이 사용되었으며, 수사본은 신의 말씀이 새겨진 성스러운 물건으로 간주되었다. 수사본을 아름답게 장식함으로써 아름다운 외면을 통해 성스러운 내용이 드러나도록 했으며, 표지는 금박을 입혀 값진 보석으로 장식하였다. 15세기 인쇄술이 발명될 때까지 수사본은 종교적인 가르침뿐 아니라 고전 문학을 기록한 유일한 형태의 책으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험 <클릭, 서양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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